쓰다 만 것들

햄스터의 신

2019년 2월 쓰다말았음

그것은 교양있는 시민이라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잘 키워주세요' 상자였다.



이정현은 길가에 떡하니 놓인 낡은 상자를 보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유성펜으로 무성의하게 휘갈겨쓴 '잘 키워주세요' 라는 수상한 문구. 낮에 내린 비를 고스란히 맞아 눅눅해진 골판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상자가 덜컹거린다.



어떤 미친놈이 이런짓을. 강아지냐. 강아지냐 고양이냐. 아니면 햄스터냐 뭐냐. 이정현은 사색이 되어 상자 앞으로 달려갔지만은 차마 그 안을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교인 이정현은 이럴때만 신을 찾았다.



'신이시여. 아직 건강하다고 해주세요.'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강아지도 고양이도 아니었다. 햄스터도 아니었다. 그 안엔... 작은 정령이 하나 있었다.



"나는 건강하다!"



심지어 말도 했다.



이정현은 도로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본 적이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가던 길을 갔다. 그는 근 2주만에 정시퇴근을 한 터라 쓸데없는걸로 시간낭비하기 싫었다.



"잠깐만! 인간 이정현이여! 나를 데려가야 한다!"

"싫어!"

"너 대답했어!"



아차. 정령한테 함부로 대답하면 안 된다고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정령이 이미 어깨에 붙었다.



이정현의 잘못은 아니었다. 정령들의 초월적인 힘 때문에 전문가들도 무심코 대답하곤 했으니.



'어쩔 수 없어. 이렇게 된 이상 퇴마사를 찾아가자.'



"불경한 생각 하지 말거라, 인간 이정현아! 나는 신이다."

"나도 알거든요? 저리 안 가?"

"나쁜 신이 아니다! 나는 너의 소망을 이뤄줄 수 있다. 나를 섬기도록 하여라."



흔한 사기 수법이다. 정령들은 거짓말을 못 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진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정령은 자신이 진심으로 소망을 이루어 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실제론 아닌 것이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잘 키워주세요' 상자 따위에 버려져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정령을 누가 무단투기했지? 근처에 퇴마사가 사나? 정령 버릴거면 정령폐기 스티커 붙여야지!'



건전한 시민의 준법정신을 건드리는 극악무도한 퇴마사로다. 이정현은 신고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안 돼! 신고하지 마!"



정령이 핸드폰에 찰싹 붙어 화면을 가렸다.



"아니, 뭐하시는 거예요."

"나 버리지 마!! 잘 할 수 있다! 안 돼! 하지마!"



정령은 필사적으로 112를 누르는 손가락을 방해하다,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본디 정령은 실체가 없고 인간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여기 정령이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대충 여기쯤 정령이 있겠지' 부분에서 정말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우, 울지마요. 신이 왜 울어?"

"무단투기 신고하면 나도 신고할거잖아아아아...."

"그럴거긴 한데..!"

"브어리지마아아아아...."



이정현의 가슴팍에 정령이 찰싹 붙어서 눈물로 옷깃을 적셨다. 이정현은 정령을 많이 보고 산 건 아니었지만 적게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처럼 대성통곡하는 정령은 처음 봤다.



정령은 자비나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경외나 숭배, 혹은 신고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이정현은 정령에게 조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불경하다..! 날 동정해? 널 저주할테다아아아..."



정령이 꺼이꺼이 울면서도 이정현을 비난했다. 역시 신고하자.



"하지마!! 날 섬겨! 난 신도가 아무도 없단 말이다. 네가 신도가 되어야 해!"

"아 진짜 싫은데..! 저 무교라고요."



온갖 신들이 활개치는 판국에 그 어떤 신도 섬기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특이하고 나름의 철학이 있으며 성질머리가 개같았다. 이정현은 퍼뜩, 이제 나도 신을 섬길때가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신고하지 말고 이 정령을 곁에 두고 갈구자는 진심을 뇌에서 적당히 그럴듯하게 포장한 생각이었다. 굿 아이디어다.



"그게 신도의 자세냐!"

"아 그럼 도로 갖다 버려?"

"버리지마!!"



그렇게 해서 이정현의 부엌 구석에는 정령을 위한 작은 신전이 세워졌다.



신전은 안쓰는 반찬통을 테이프로 붙여 만들었다. 키우던 다육이 화분을 통째로 옆에 두고, 거기에 탱화랍시고 A4용지 찢은거에 볼펜으로 허접하게 졸라맨 그려 대충 세워놨다.



"이정현아. 일부러 이렇게 하라해도 못하겠다!"

"되게 까다롭네. 어차피 신님 갈 데 없잖아요. 거기 있어요."



그나마 겨우 생긴 신도가 저 모양이라니. 정령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신전 세워놨으면서 제사는 뒷전이고 키우던 햄스터 밥부터 챙기는 무성의한 신도의 태도에 화가 났다.



"신보다 햄스터가 먼저냐!"

"우리 햄숑이 잘있었어?"



이정현은 무한한 애정으로 햄숑이를 쓰다듬고 밥과 물을 챙긴 후 열심히 쳇바퀴를 닦았다. 그리고 정령에게는 천원에 4개들이 다X소 플라스틱 간장종지에다 햄숑이가 먹고 남긴 사료를 담아줬다.



"오늘의 공물입니다."

"장난쳐?!"

"기도드립니다. 음... 각박한 세상에서 서로 화이팅. 아멘."



그러고 이정현은 느긋하게 씻고 드러누워 새근새근 잠들었다.



밤새도록, 정령은 괘씸한 신도 이정현에게 신벌을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힘이 없었다. 공물이라도 먹어야 신으로서 힘을 키우고 여러가지 전능한 일을 할 수 있는데, 먹을 공물이 햄스터 사료밖에 없다.



그것도 맛있는 부분은 저 시꺼먼 햄스터가 다 먹고 맛없는 것만 남았다.



정령은 꺼이꺼이 울면서 햄스터 사료를 먹었다. 정령의 울음소리와 햄스터의 쳇바퀴 소리가 끔찍한 하모니를 이루는 와중에도 이정현은 잘만 잤다.



다음날 아침, 이정현은 반찬통 신전에 수돗물을 바치고 대강 기도를 했다.



"기도드립니다. 집에서 사고치지 말고 가만히 계시기를. 아멘."

"그건 애완동물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더냐!"

"맞는데요."

"제대로 경배하거라."

"출근해야돼서 바빠요."



또 다음날 아침, 신전에는 브로콜리 줄기가 올랐다.



"기도드립니다."

"하지마!"

"아 뭐 해줘도 지랄이야. 제가 슬슬 재미들렸을때 얌전히 기도 받는게 좋을걸요."

"신을 우습게 여기면 신벌이 내리는것을 모르는건가! 비록 내가 지금 힘은 없지만, 네 자식같은 햄스터에게 벌을 내릴 수는 있다!"



그래서 이정현은 정령을 들고 출근했다. 회사 동료들이 아는체를 해왔다.



"이과장님, 웬 정령이예요?"

"길에서 주웠는데, 이따 점심시간에 옆에 퇴마사 사무실에서 폐기하려고요."

"어유, 잘 생각했어요. 길거리 정령은 병균도 많고 그래서 얼른 폐기해야죠. 탕비실에 정령봉인 테이프 있으니까 그거 붙여둬요."



봉인테이프 때문에 말도 못하게 된 정령은 이정현 과장의 책상 한구석에서 소리없이 엉엉 울었다. 정녕 내가 신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허접한 신이라 이런 일이 생긴 것인가. 그래도 신인데 이럴수는 없다.



하지만 이정현 과장은 정말로 점심시간에 정령을 들고 퇴마사 사무실을 방문했다.



"폐기하는데 얼마 들죠?"

"무게 재봐야해요."



6g이었다.



"3300원입니다."



에이씨. 정령을 길거리에 막 버린 무단투기범이 내야 할 돈인데. 이정현은 그냥 정령이 3일동안 집 지켜준 값이라고 생각하고 돈을 지불했다. 그리고 대성통곡하는 정령을 남기고 회사로 돌아갔다.



그런데 한시간쯤 뒤에 퇴마사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특수정령이라 저희쪽에서 처리가 안 돼요. 큰 데 가셔야해요."

"그쪽에서 큰 데로 인계 안 됩니까?"

"되긴 하는데, 중계비용으로 추가 요금 8000원 받습니다."



이정현은 8000원이 존나 아까웠다. 주말에 이정현이 직접 정령을 데리고 큰 퇴마사 사무실로 찾아가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적어도 하루는 이정현의 집에 정령을 놔둬야 할 터이다. 그 사이 햄숑이가 위험할 수도 있다.



8000원이냐, 햄숑이의 안전이냐. 이건 재볼것도 없다.



"지금 결제하러 갈게요."



어차피 옆건물이라 가는데 3분도 안 걸린다. 그런데 이정현이 퇴마사 사무실을 방문하자 마자, 정령의 울음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이정현아!!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햄숑이를 건드리지 않으마. 햄숑이에게 축복을 내려주겠다. 햄숑이가 이빨 관리를 잘 하게 만들어주마!"



퇴마사가 머쓱하게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폐기하려고 테이프를 떼서..."

"그... 저 정령이 햄스터 이빨 관리 정돈 할 수 있나요?"

"뭐, 될 겁니다."



햄숑이는 전에 이빨이 한 번 부러진 뒤로 뭐든 잘 안 갉으려 했다. 지금까지는 이가 너무 길어지면 이정현이 직접 잘라줬으나 그 때 마다 스트레스받는 햄숑이의 모습을 보는 것도 마음이 아픈 일이었다. 정령이 잘라준다면야 만사 해결이지.



그래서 이정현은 퇴근길에 정령을 다시 데려왔다.



"신님때문에 3300원만 날리고 이게 뭐예요. 햄숑이 이빨 관리나 잘해줘야 합니다."

"신에게 조건부로 신앙을 약속하다니, 이 불경하고 고얀 놈! 내가 힘을 키우면 너의 이빨은 무사할 줄 아느냐."



이정현은 자신의 이빨을 지키기 위해 정령이 힘을 키우지 못하도록 신전을 베란다로 옮겼다. 그리고 천원에 4개들이 다이X 플라스틱 간장종지를 치우고 비닐 찢은걸 올려놨다.



"설마 이게 공물 그릇이라곤 하지 말거라."



비닐 조각 위에 이정현이 탕비실에서 가져온 둥글레차 티백 찌꺼기가 올라왔다.



"오늘의 공물입니다."

"이정현아!!"

"기도드립니다. 햄숑이가 이갈이 좀 하게 해주세요. 아멘."



그리고 그날 밤 정령은 좀 많이 울었고 햄숑이는 넣어둔 나뭇가지를 조금 갉았다.



다음날 아침 이정현은 정령을 찾았다.



"햄숑이가 이빨을 그렇게 열심히 갉진 않던데요."

"그게 내 최선이었다. 이정현아, 적어도 공물 그릇은 플라스틱으로 해야하지 않겠느냐."

"근데 힘을 키우면 제 이빨을 어떻게 하신다면서요."

"안 한다, 이 녀석아!"



그래서 신전은 다시 이정현의 부엌 구석으로 돌아갔다. 다육이도 돌아왔다. 공물 그릇도 비닐 찢은거 말고 무려 도자기 간장종지로 업그레이드됐다.



게다가 오늘 공물은 청주 한 잔과 말린 장미 꽃잎이었다. 청주는 돼지고기 냄새 잡을 때 쓰던거고, 장미 꽃잎은 반년전에 꽃다발 말려 만든 방향제에서 몇 장 꺼낸 것이며, 심지어 공물 그릇도 햄숑이의 밥그릇 컬렉션에서 가져왔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까지에 비하면야 진수성찬이다.



"기도드립니다. 햄숑이가 좀만 더 이갈이 하게 해주세요. 아멘."

"오냐!"



정령은 공물을 맛있게 먹었다. 그날 밤 햄숑이는 밥도 열심히 먹고 나뭇가지도 갉고 이정현의 손가락도 자를 기세로 깨물었다. 이정현은 감동받았다.



그래서 그 다음날 이정현은 정령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햄스터의 신이십니다."



햄스터의 신이 아니다. 그러나 햄스터 관리 좀 해줬다고 저 재수없는 인간의 경배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정령은 이거 좋아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뇌에 휩싸였다.



그러는 사이 이정현은 공물로 옥수수 수염차와 건포도 세 개를 바쳤다. 아까 롤케이크 먹으면서 건포도만 따로 모은 것이다. 진심으로 숭배하기 시작했으면서 여전히 공물이 묘하게 성의없었다.



정령은 기분이 너무 애매했다.



"기도드립니다. 햄숑이가 건강하게 해주세요. 아멘."

"잠깐만, 이정현아. 나는 햄스터의 신이 아니다."

"예?"



그 며칠 사이 정령이 햄스터의 신이라고 굳게 믿어버린 이정현이 당혹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공물도 내가 먹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지금까지 잘만 먹었으면서 뭔 소리예요."

"그건 네가 바라는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정현은 잠깐 고민하다가, 어젯밤 햄숑이에게 물려 손가락에 감아둔 반창고를 풀었다. 그리고 상처를 짜내 공물그릇에 피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그럼 당신은 뭐 하시는 신이십니까?"



그 순간 신전을 중심으로 폭풍이 불었다. 인간의 피를 먹어치워 진정한 힘을 되찾은 정령이 그 영광스런 모습을 드러내며 강림했다. 온 몸의 털이 쭈뼛 서고, 잘 자던 햄숑이도 놀라서 깼으며, 다육이마저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성장했다.



현신한 정령은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정현은 신의 현신이 눈부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사이 기괴하게 자란 다육이들이 이정현의 온 몸을 휘감았다.



정령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촉수의 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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