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안의 화원]의 뒷얘기

사랑이 넘치는 메이드 시언이

본편에서 생략된 그 파트

메이드란 단순히 가사노동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의 말벗이 되어주고, 길동무가 되어주고, 또 필요하다면 몸을 써서라도 이부자리를 덥혀드리는 것. 그래서 주인의 행복을 내 행복처럼 여기는 것이 메이드의 본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맨티스트 출신인 나는 지구상 그 어떤 메이드보다 유능하고 이상적이며 완벽하다. 나는 내가 메이드가 되어 괴로워하길 바라신다는 모 도련님의 바램에 응답했다. 지금까지 나를 정신적으로 괴롭혀왔던 도련님들이 나 때문에 당황해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통쾌함을 느끼기 전까지 나는 멈추지 않는다. 메이드 시언이는 오로지 도련님들의 행복만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

절대,

화난 것이 아니다.

"시언이 엄청 에쁘지! 시언아 가서 다 꼬시고 와!"

희승 도련님이 신나서 붕붕 뛰어 나는 수줍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늘 내 주위에는 학생들이 구름떼처럼 따라다녔다. 더 꼬실 사람도 없다.

그런 왕자님이, 메이드복 입고 나타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메이드 시언이랍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우와아아아! 오빠 죽도록 사랑해!!"
"메이드 시언이니이이임!! 저를 교육해줘요옷!!"

축제가 벌어진다.

완벽한 메이드는 모든 명령을 철저하게 수행하며, 그게 아이돌의 역할일지라도 훌륭하게 해낸다. 나는 나를 구경하는 도련님들에게 손키스와 손하트를 날려주었다.

"꺄아악! 오빠아아아!!"

호칭 아무렇게나 부르는 도련님들이 단체로 쓰러졌다. 희승이가 박수치며 좋아했다.

"역시 시언이는 메이드 옷을 입어도 왕자님이구나!"
"다 도련님이 훌륭한 옷을 만드신 덕분이지요."
"응! 난 대단해!"

나를 데리고 전교에 자랑하겠다는 도련님의 원대한 목적을 이루는데 내가 도움이 되어 기쁘다. 메이드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어쩌면, 내가 분노로만 움직였더라면 나는 이쯤해서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아까 욱해서 뛰쳐나왔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그런 감정은 사그라들고 이성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대낮에 섹시 코스튬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아무데나 하트 날리며 아무나 유혹하고 있으니 나는 내 안에 분노도 수치도 아닌 또 다른 감정이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메이드 하는거 즐겁다.

아기고양이들에게 하도 휘둘리다가 드디어 내가 맛이 가 버린 것일까. 아니, 그래도. 이거 진짜 재밌다. 윙크만 날려도 감동받아 운다. 왕자님 왜 또 저러냐고 수군거리는 학생들에게 한 번만 웃어주면, 그들은 1초 전까지 편협했던 자신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며 좋아 쓰러진다.

내가 상식이나 자존심 따위를 지킨다고 이 재미를 모르고 살았다. 근본모를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화가 안 났다는 것도 아닌데, 아, 뭐. 로맨티스트인 내가 화를 낼 리는 추호도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나는 즐겁고 화나서 머리가 핑 돌아 어지러웠다.

"그런데 태윤 도련님은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웃어봐요. 도련님이 바라는 대로 제가 전교에 메이드복을 자랑하면서 망신을 당하고 있잖아요."

아까부터 정신없는 틈을 타 계속 도망가려는 태윤이의 손목을 꽉 잡았다. 

"태윤 도련님은 어디 가시나요?"

과연 격식 높은 귀족들의 자제분들만 다닌다는 아라남고 학생답게, 태윤이는 동물같은 감각으로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걸 느낀 듯 하다. 태윤이가 내 눈치보며 땀을 뻘뻘 흘렸다.

"아니, 너... 어... 생각 외로 너무 즐겨서 재수없고 이상한 핑계대서 나한테 무슨 짓 할까봐... 화장실 좀 가게...."

진심을 말할건지 핑계를 둘러댈건지 둘 중 하나만 했으면 한다. 태윤이를 뒤에서 꽉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중요한 일을 하러 가시는데 메이드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되죠. 제가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 해 도와드리겠습니다. 무슨 짓 안하고요."
"어어....."

피부를 맞대고 있으니 태윤이 핏기가 싸악 내려가는게 분명히 느껴졌다. 우리 사이는 어쩌다 이렇게나 틀어졌을까? 분명 처음엔  내 사랑이 약물에 중독되는걸 두고 볼 수 없었던 것 뿐인데 어쩌다보니 내가 메이드가 되어버렸다. 대체 왜?

그러나 어쨌든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고, 나는 이 자존심 싸움인지 뭔지를 기를 쓰고 이길 것이다. 화난 건 아닌데 아무튼 그렇다.

이대로 지체없이 태윤이를 화장실까지 데려가, 최음제 뿌린 것과 내 고통을 바라던 것에 대해 사과를 들을 때 까지 괴롭힐 생각이었다. 그러나 역시 상대는 만만하지 않았다. 태윤이는 갑자기 내 치마를 들춰 공격했다.

"꺅!"

귀여운 옷을 입는 바람에 귀여운 비명이 절로 나왔다. 급하게 치마를 수습하는 사이, 태윤이는 재빨리 내 품을 빠져나가 직선으로 달려갔다. 당했다! 하지만 난 이전의 시언이가 아니야, 메이드 시언이다!

"도련님들, 태윤이 잡아주세요!"

주종관계가 뒤바뀐 명령...아니, 부탁을 했다. 귀여운 메이드 시언이를 보고 보호본능이 자극된 도련님들이 눈이 충혈되어 태윤이에게 달려들었다.

"큭...!"
"시언이 별로 메이드같지는 않네."

태윤이는 잡았다. 그러나 이번엔 희승이가 실망했다. 희승이는 또 가드가 약해져있던 내 치마를 들춰버리며 완전 귀엽게 소리쳤다.

"나야, 태윤이야! 누가 주인님이야!"
"그건...!"

주인님은 메이드를 여러 명 거느릴 수 있지만 메이드는 그럴 수 없다. 설령 여러명을 섬기더라도 최우선을 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희승이와 나 둘 다 만족할만한 제안을 할 수 있다. 메이드 시언이는 그 정도로 능력이 좋다.

나는 희승이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았다.

"희승이가 나한테 도련님들 다 괴롭히고 오라고 명령하면 희승이를 주인님으로 섬길게."
"좋아!"
"태윤이 괴롭히고 오겠습니다, 주인님!"

격려의 뜻으로 엉덩이 한 대 맞았으나, 그 잠깐 사이에 태윤이는 도망쳤다. 태윤이가 있던 자리엔 최음제를 맞아 무력해진 학생들만 움찔움찔 떨고 있었다. 


*


도망쳐봤자 학교는 내 손 안에 있다. 학생들 뿐만 아니라 아라남고 전체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 내 뜻대로 움직인다. 나는 그저 전교방송으로 태윤이 찾아오라고만 하면 된다. 여러 의미로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후배위로...아니, 그건 태윤이가 좋아해. 어쨌든 뭔가 할 때까지 메이드 시언이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전에는 태윤이를 걱정해서 방송실을 찾았던 것도 같지만, 다 옛날 일이다. 부츠로 또각거리는 소리를 경쾌하게 울리며 나는 복도를 가로질렀다. 시체를 발견한 피라냐처럼 몰려드는 학생들은 적당히 응대해 쳐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유독 내 사랑의 필살기들이 통하지 않는 특별한 아이가 한 명 있었다. 지나가던 솔이가, 귀신 본 것 처럼 사색이 된거다.

"너, 무, 뭘...."
"솔 도련님."
"으아악!!!"

말 걸자마자 솔이가 기겁했다. 그렇게까지 괴생명체 보듯 할 건 없는데.

"왜 그러시나요. 메이드 시언이는 상처받았어요."
"아악! 저리 가!!"

솔이가 방금보다 더 기겁해 뒤로 물러났다. 속상한 메이드 시언이가 도련님을 슬쩍 코너로 몰았다.

"도련님?"
"야, 너 뭐야. 뭐야 미친...뭐야. 꺼..꺼져라 사탄마귀야! 진짜 남시언을 어디다 뒀어!"
"메이드 시언이는 여기 있답니다."
"남시언은 이런거 안 즐겨!"

남시언은 이런거 즐기는데. 솔이가 나를 너무 모른다. 솔이는 정신없이 내 얼굴을 더듬으며 횡설수설 방언을 터트렸다.

"누구지? 누가 남시언 껍데기에 이런 짓을 했지? 최면? 세뇌? 정신개조를 당했나? 악령이 씌였나? 아, 썅. 짚이는 새끼가 너무 많아. 남시언을 순종적인 노예로 만들어서 팔아치우려고! 남시언은 이미 순종적인 개돼지 노예인데 씨발 상도덕도 없는 새끼들!"
"으음."

그러고보니 내 정신상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거에 솔이도 아주 큰 책임이 있었지. 내 궁극적인 목적은 태윤이가 울면서 사과하게 만드는 거지만, 솔이를 울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게 로맨티스트가 할 짓은 아닌데 지금의 나는 로맨티스트가 아니라 메이드 시언이니까.

"범인은 학생회 새끼들이 분명하다. 가자, 남시언. 그 새끼들 족치자."
"아니요, 도련님. 더 급한 일이 있답니다. 잠깐 이리로 와 주세요."
"네 꼬라지보다 급한 일이 더 있냐?" 


솔이를 번쩍 안아들고 방송실 안으로 들어갔다. 품에 쏙 들어오는 도련님이 버둥대었으나, 나는 사랑이 넘치는 메이드. 굴하지 않는다. 방송실까지 달려갔다. 주인이 자리를 비웠으니 방송실은 공실이다.

문과 창문을 꼼꼼하게 잠갔다. 4층이여도 방심하면 안 된다.

"무..문을 왜 잠가. 당장 남시언의 몸에서 썩 꺼져라 이 사악한 악령아!"

안 그래도 솔이는 재밌는 아이인데 과민반응 하니까 더 재밌다. 길고양이처럼 잔뜩 날세우고 경계하는 솔이를 벽으로 슬슬 밀었다. 도망치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남시언의 몸을 차지한 사악한 악령과 맞서싸우기 위해 날 비장하게 노려보는 눈빛이 귀엽고 흥분된다.

"맨날 화내시고 그러는거 다 도련님이 욕구불만 이라서 그런거랍니다. 메이드 시언이가 해결해 드릴게요."

무릎부터 꿇었다. 메이드의 일을 할 시간이다. 솔이의 말랑말랑한 허벅지를 진득하게 더듬었다.

"화 낼 만하니까 내는, 흐윽... 손 떼, 시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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